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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호리 히사타로와 아들 호리 리키타로가 1888년 인천항 인근 조계지(현재의 차이나타운)에 11실 규모의 대불호텔을 개관하여 서울로 출입하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했습니다.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인천에서의 숙박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대불호텔은 중국 음식점으로 쓰이다가 1978년 결국 철거됩니다.
고종 황제가 1902년 덕수궁 인근,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부지에 당시 황실 전례관이었던 프랑스인 앙투아네트 손탁 여사를 위해 지어 하사한 25실 규모의 호텔입니다. 1909년 손탁 여사가 한국을 떠난 이후, 경영난을 겪기 시작하던 손탁호텔은 조선호텔이 개관하면서 1917년 결국 영업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최초의 조선호텔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의해 환구단이 있던 소공동에 64실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정부가 이를 인계받았습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고, 6/25 때에는 미군 휴양시설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조선호텔 바로 뒤편에 한국에서 기업가로 활동하던 일본인 노구치 시타가우가 1938년 개관한 111실 규모의 호텔입니다. 그가 허름한 복장으로 조선호텔을 찾았다가 쫓겨난 후, 바로 뒤편의 부지를 사들여 조선호텔의 두배인 8층 높이로 호텔을 건립했습니다. 1963년 조선호텔과 함께 국제관광공사로 이관되었습니다.
1955년 현재의 앰배서더 호텔 위치에 민간 기업인 서현수가 2층에 19실 규모의 금수장을 개관했습니다. 1965년 명칭을 앰배서더로 바꾸었고, 1975년에는 450실 규모의 대규모 호텔로 재개장했습니다. 1987년 글로벌 브랜드 Accor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내 민간 자본이 건립한 최초의 호텔입니다.
1961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로 워커힐호텔의 건립을 추진했는데, 국제관광공사가 출범하자 사업을 이관합니다. 그리고 1963년 객실 5동과 빌라 13동, 전망대와 차고 등 2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워커힐호텔이 개관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나이트클럽, 볼링장, 실내수영장이 도입되었습니다.
1964년 남산에 아시아반공연맹(현재 한국자유총연맹)의 자유센터가 들어섭니다. 이때 5층 규모의 본관 옆에 17층 규모의 자유회관이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함께 건립됩니다. 1966년 국제관광공사가 이를 인수하여 개축 후 1967년 타워호텔로 개관했으나, 바로 매각에 착수했고 1968년 공성산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조선호텔을 넘겨받은 국제관광공사는 새로운 호텔들이 들어서며 경쟁력을 잃어가던 조선호텔을 철거하고 대규모의 호텔로의 재건축을 추진했습니다. 1970년 미국의 아메리칸 항공과 함께 19층에 504실 규모의 새로운 조선호텔을 개관했고, 1981년 글로벌 브랜드인 웨스틴을 도입하며 웨스틴 조선호텔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1973년 롯데는 국제관광공사로부터 반도호텔을 인수하면서 인접한 국립중앙도서관 부지까지 함께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기존 건물들을 철거한 후, 1979년 38층 규모의 롯데호텔 본관을 신축했습니다. 1980년에 면세점, 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에는 신관을 증축하여, 현재 1,015실 규모의 초대형 호텔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72년 남산 외인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남산에 호텔 건립을 지시하면서, 1973년 한일 합작으로 서울 미라마 관광회사가 설립되어 ‘남산호텔’의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611실 규모의 ‘하얏트 리젠시 서울’로 1978년 개관한 호텔은 대대적 리모델링을 거쳐 1993년 ‘그랜드 하얏트 서울’로 변경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원이 있던 장충동 부지에 1967년 청와대 영빈관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1973년 관광 민영화 추진 시기에 삼성에 이를 넘기고 관내에 새 영빈관을 건립했습니다. 삼성은 인수한 기존 영빈관 옆에 464실 규모의 신라호텔을 증축하여 1979년에 개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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